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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독서기록]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by 에스제이엘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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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말하고 있는 ‘착각’은 정확히 말하면 ‘능력주의는 언제나 공정하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신화적 주문이 실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언뜻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는 것은 대학 입시와 관련된 문제다. 매년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우리나라의 입시지옥은 잘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미국도 관련 문제가 점점 부각되는 듯하다. 몇 해 전에는 유명한 대학교들과 연관된 대규모 입시부정사태가 적발되기도 했다니. 어떤 학생이 어떤 대학에 들어가는 자격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할까? 간단히 생각하면 공정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학생들이 입학하는 게 가장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의 수학능력성적은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부모의 재력이 아이의 대학입학성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꼭 불법적인 입시부정이 아니라도, 아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고, 과외를 시키고, 입시에 도움이 되는 각종 경험과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 대입에 유리한 자리를 얻게 된다면, 그건 ‘공정’한 걸까? 이런 현실이 장기적으로 계층의 고착화를 초래할 게 분명하다는 점은 뒤로 하고라도, 흔히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개인의 실력에 달린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책에서 지적하는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성공한 이들에게는 교만을 실패한 이들에게는 굴욕을 안겨주어 결국 공동체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그가 타고난 행운 때문이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취득한 능력 때문이다(물론 실제론 앞서 언급했듯 거기엔 개인의 능력 이외의 것들이 개입되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반면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한 이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인물들로 치부된다. “공부 못하면 저렇게 배달이나 한다”는 식의 멍청한 조롱도 이런 생각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절반의 사실만을 다룬 의견이라는 것과, 이런 식의 무시와 조롱이 반복되면, 극단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게 되고, 나아가 공동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이다.(이 주장은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실제로 세계는 트럼프(미국)나 르 펜(프랑스) 같은 포퓰리스트들과 브렉시트(영국) 같은 정책을 지지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저자는 여기에 오랫동안 능력주의에 의해 무시받아 왔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분노가 깔려 있다고 본다. 한 번 분열된 세상은 쉽게 다시 하나가 되기 어려운 법이다. 이들의 분노가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누가 알게 될까.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서문에서 언급한 학력주의의 타파를 그 시작으로 본다. 오늘날 학력주의는 능력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다. 특히 대학 입학과 관련된 절차는 문제의 핵심이다. 부모의 재력이 아이의 점수와 상관관계가 있으며, 오랫동안 극심한 수험경쟁에 시달린 학생들이 겪는 일종의 트라우마 문제도 심각하다. 여기에 학생시절부터 능력주의에 물든 그들의 태도는 사회를 찢어놓을 뿐이다.



     저자는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해법을 제안한다. 현재처럼 대학입학시험에서 거둔 성적 순으로 입학자를 자를 것이 아니라, 지원한 학생들 중 일정한 자격이 되지 않는 인원들만 탈락시킨 후 나머지 인원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제비뽑기를 통해 입학자를 선정하자는 것. 입학성적이 우수하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인재라고 할 수는 없고, 최소한의 학업능력을 가진 이들 중에서 뽑았기 때문에 충분히 학업을 지속할 수 있다. 애초에 시험 성적 하나로 인재여부를 파악하는 것 자체도 무리였으니까.(문제 하나를 더 맞추고 못 맞추고가 그렇게 중요할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오직 경제적 지표로 사람과 자격을 평가하는 현재의 기준, 관점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그가 공동체에 얼마나 유익한 일을 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컨대 GDP 수치는 상승시키나 실제로는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금융업계(투기) 종사자들의 막대한 수입에는 보다 적극적인 세금을 매김으로써 그 사회적 인정의 수준을 낮추는 식의 정책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식의 일은 엄청난 저항을 받을 게 뻔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도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 국민이 빚을 내서 주식투기에 빠져 있거나,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지 못해 안달하는 절망적인 우리나라에선 더더욱. 1점이라도 ‘내가 얻은 것’이라고 여기며 악착같이 싸우려는 사람들에게서 과연 이런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까.



     하지만 뭔가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받은 것에 감사하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함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이뤄내지 못한다면―결국 다 같이 침몰하게 될 뿐이다.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애초에 우리가 가진 능력의 대부분(부모의 재산과 건강, 심지어 지능도)은 우리의 선택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얻은 것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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